광복 70주년과 비운의 독립운동가들

광복 70주년 맞이, *미복권 독립운동가들에 대하여…
*미복권(未復權) : 한 번 상실한 권세를 다시 찾지 못함.

광복 70주년을 맞아 영화 <암살>이 장안의 화제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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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 포스터 / 출처 : 네이버 영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라는, ‘충무로에서 성공한 적 없는’(최동훈 감독) 소재에도 불구하고 의미와 재미를 모두 좇는데 성공했다는 평가가 많더군요. 특히 약산 김원봉의 등장을 두고 “놀랍다”, “반갑다”는 반응이 적잖은 것 같습니다.

광복 70주년 맞이, 비운의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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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김원봉’>

약산 김원봉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와 군부 수뇌 등 일제 요인을 암살하고, 경찰서와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 수탈기구에 대한 테러를 주도한 의열단의 리더였습니다. 이후 조선의용대 창설, 임시정부 광복군 부사령,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등을 거치며 조국해방을 위해 몸바쳤고, 해방 뒤엔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해 최고인민회의(국회) 상임위 부의장 등을 지냅니다.

좌·우 진영은 물론 한때 무정부주의와도 가까웠던 약산은 남과 북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월북해 북한정부에 참여하는 바람에 남한에서 그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됐고, 약산 본인은 1950년대 말 북한에서 “장제스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엄혹한 일제와의 싸움은 이겨냈지만, 분단이라는 민족 내부의 분열 앞에서 그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비극의 독립운동가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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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의열단’/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문)>

조국해방에 몸 바치고도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환대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는 약산만이 아닙니다. 1930~40년대 만주에서 일제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이홍광과 허형식도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복 70주년 맞이, 비운의 독립운동가 <이홍광>
이홍광 독립운동가는 1910년 경기도 용인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 대개의 농민들이 그랬듯이 그의 집안도 극심한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1920년대 중반 만주로 이주합니다. 이홍광 독립운동가는 1930년 지린성 이퉁현에서 동료 7명과 함께 ‘친일파(개)를 때려잡는다’는 의미에서 타구(打狗)대라는 자위조직를 만들었고, 이는 남만주 최초 항일유격대인 반석유격대로 발전합니다. 이홍광 독립운동가는 1933년 중국인 양정위(楊靖宇)와 연합해 300여명 규모의 동북인민혁명군 1군을 만들어 참모장이 됐고, 이듬해 1군이 2개 사로 재편될 때 1사 사장에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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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현 조선족중학교(홍광중학교)에 세워진 이홍광 석상 / 출처 : 독립기념관>

이홍광 독립운동가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켜 중국 침략을 본격화한 뒤인 1934년 12월~1935년 1월 200여명의 기마부대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평북 후창군(현 김형직군)을 습격해 조선총독부를 깜짝 놀라게 합니다. 엄혹한 일제 통치 아래 국내에서는 무력봉기는 생각하기도 힘든 시절이었는데도 말이죠. 그는 만주에서 활동할 때도 일본군과 만주국군 1만여명의 포위공격을 받게 되자 부하들에게 예전에 탈취한 일본군복을 입힌 뒤 유유자적하게 포위망을 빠져나간 뒤 뒤에서 기습을 하고, 심지어 보급품을 싣고 가던 일본군 차량을 세우고 “왜 이리 늦냐”며 호통을 친 뒤 군수품을 가로채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의 배포에 눌려 속절없이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일본군 이야기를 들으며 이역만리에서 독립을 갈망하던 조선사람들은 잠시나마 속이 시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1935년 남만주 환런현과 신빈현 경계에서 200여명의 부하들과 행군하던 도중 우연히 일본군을 만나 교전을 벌이던 이홍광 독립운동가는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5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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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미디어 ’일본과의 전쟁’>

광복 70주년 맞이, 비운의 독립운동가 <허형식>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한해 전인 1930년 5월1일. 노동절을 맞아 하얼빈에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노동자·농민 시위가 열립니다. 시위대는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영사관 유리창과 내부 기물들을 박살내고, 총영사 관저까지 침입합니다. 당시 시위 주동자는 약관 21살이었던 조선인 청년 허형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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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독립운동가 / 출처 : 한국역사연구회>

구한 말 의병장이었던 왕산 허위 선생의 5촌 조카이기도 했던 허형식은 이 사건으로 중국 당국에 수감됐다가 풀려난 뒤로도 쑹화강 하류 위허 등지에서 반일 선전·조직 활동에 매진합니다. 1935년 반일 유격대와 국민당 계열 의용군 등이 연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만들어지자 2단 단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군사지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1939년 북만주지역 항일연군이 통합돼 출범한 3로군의 참모장 겸 3군 군장으로 취임하며 최고위급 지휘관으로 이름을 널리 알리기도 합니다.

그 즈음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하며 항일연군 1~3로군 대부분이 소련 영내로 이동했지만, 독립운동가 허형식은 주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내 만주 잔류를 고집하며 무장투쟁을 이어갑니다. 영하 30~40도 추위가 몰아치던 북만주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하는 등 활동을 이어가던 독립운동가 허형식은 1942년 대중조직 현장점검을 나갔다가 칭청(현재는 칭안)현 산골에서 토벌대에 포위돼 사살되고 맙니다.

토벌군은 의기양양하게 독립운동가 허형식의 목을 베어 경찰서 앞에 내걸었고, 부하들이 뒤늦게 주검을 수습하기 위해 현장에 갔지만 몸둥이마저 승냥이 떼들에게 뜯어먹히고 사라진 뒤였습니다. 부하들은 근처에 남아 있던 다리 한쪽 아랫부분으로 독립운동가 허형식의 묘를 조성합니다.

이렇듯 조국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두사람이건만, 남과 북 모두에서는 잊혀지거나 격하된 독립운동가입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었기에 남한에서는 해방 뒤 수십년 동안 언급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과 직접 관련 없는 독립운동은 주목 대상이 아니었고, 경우에 따라 ‘김일성 장군의 부하’로 격하돼 역사에 기록됐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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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백과 ’보천보 전투’>

이홍광 독립운동가의 후창군 습격 사건은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보다 앞선 국내 진공작전이지만,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의 업적(보천보전투)을 가릴까 우려해서인지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1930~40년대 만주에서 김일성 못지 않은 고위급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허형식은, 현재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영도 아래 독립운동을 벌였다’고 축소·왜곡돼 기려지고 있습니다.
지린성 판스시 조선족중학교 이름은 이홍광의 이름을 딴 홍광중학교입니다. 교사 정면에 있는 큰 비각에는 ‘항일 민족영웅 이홍광 장군’이라는 글귀가 선명합니다. 그가 활동하던 이퉁현과 신빈현에는 독립운동가 이홍광의 흉상과 기념비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조국에서는 잊혀진 인물이지만, 중국 현지에서는 나름대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셈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이러다 조선의 독립운동사도 동북공정에 편입돼 ‘중국의 역사’로 기억되는 것 아닐런지 걱정이 앞섭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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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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