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혁신> 국민엄마 김해숙, 국민배우로.

조선 21대 왕 영조와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그린 <사도>가 최근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 언론 시사회장에서 주연 배우들과 함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중견 배우 김해숙씨도 참석했습니다. 영화에서 그는 영조시대 대왕대비였던 인원왕후로 출연합니다. 기자간담회에서 오간 재미있는 이야기 중 하나는 한국 영화에 남자배우 이경영이 있다면 여자배우는 김해숙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 같아요. 그런데 많은 중견 배우들이 숫자 안에 갇혀 있어요. 영화 안에서 에너지를 뿜어내고 싶고 숫자를 벗어나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게 안타깝죠. 다행히 저에게 많은 것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온다는 게 소중한 것 같아요. 앞으로 더 많은 작품으로, 이경영씨보다 더 많이 나오고 싶네요.”  이렇게 대답하면서 그는 사람 좋게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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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깡철이’>

앞서 말한 그의 이야기처럼 국내 배우들은 숫자에 불과한 나이에 많이 갇혀 있습니다. 특히 여배우들은 더 그렇습니다. 40대만 넘어서도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은 거의 공식화돼 있습니다. 50, 60대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저 주인공의 엄마로, 일가 친척으로 나오는 것이 고작입니다. 오죽하면 ‘밥상용 배우’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관성과 관행을 올해 예순인 여배우 김해숙이 깨고 있습니다. 그는 ‘국민엄마’로 불릴 만큼 독보적인 엄마 연기를 보여준 배우였습니다. 그에 앞서 김혜자, 고두심씨 등 국민엄마 계보를 이어온 출중한 배우들이 있었지요.
엄마 연기에 내로라하는 활약을 펼치던 그는 엄마 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요 작품에 주역으로 나서며 개성 강하고 독특한 색깔을 가진 캐릭터들을 소화하고 있습니다. 마치 여배우가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하는지 롤모델을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죠.

1974년 MBC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그는 오랫동안 안방극장에 머물렀습니다. 다양한 작품에서 활동했던 그가 엄마 연기의 정점을 보여줬던 것은 2000년 방송됐던 <가을동화>였습니다. 절절한 모성을 연기했던 이 작품 이후 그는 ‘국민 엄마’로 떠올랐고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엄마를 소화했습니다. 이후 그는 영화로 활동 무대를 확장했고 그의 전성기를 꽃피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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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드라마 해바라기’>

그의 출연작들을 살펴보면 어느 것 하나 비슷한 역할을 찾을 수 없는 데다 모두들 평범하지 않습니다. 영화 <해바라기>(2006년)에선 자식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는 위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이었고 영화 <무방비도시>(2008년)에선 면도칼을 씹어먹는 전과 12범 소매치기를 연기했습니다. 당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중견배우 중에 이런 캐릭터를 제안 받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며 도전의 이유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개봉됐던 영화 <경축 우리사랑> 역시 파격 그 자체였죠. <데미지>가 성별을 달리한 코믹버전쯤으로 생각하면 될까요. 이 작품에서 그가 연기한 봉숙은 비루한 삶을 이어가던 전형적인 아줌마에서 딸의 연인인 스무살 연하 청년과 사랑에 빠지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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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영화 박쥐’>

영화 <박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히스테리하고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진 ‘라여사’를 연기하며 그는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 불안감과 초조함을 표현하면서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줬습니다. <도둑들>(2012년)에서는 귀엽고 푼수끼 있던 도둑 ‘씹던껌’을 연기하며 중국 배우 임달화와 중년의 로맨스 연기도 펼쳤습니다. 또 영화 <깡철이>(2013)에서는 순진무구한 바보엄마 순이로 등장했고, 천만영화 <암살>에서는 임시정부의 경성연락소인 카페 마담으로 등장해 강렬한 최후를 보여줬습니다. 드라마 <하얀 거짓말>에서 그가 연기했던 악독한 시어머니는 아마 드라마사상 몇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악녀로 기록될 정도일 겁니다. 지난해 방송됐던 드라마 <호텔킹>에서도 그는 완벽주의자인 호텔리어로 출연해 극을 이끄는 구심점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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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경축! 우리사랑’>

예전 그와 했던 인터뷰에서 그는 취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눈떠서 활동하는 시간은 가정과 연기, 이 두가지만 오가며 치열하게 살다 보니 다른 취미에 눈 돌릴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죠. 가족을 챙기는 것 외의 시간은 온전히 연기와 배역 생각에만 빠져 있다고 말입니다. 당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흥분되는 호기심과 궁금증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있습니다. 배우가 아닌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그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더 보여줄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남의 인생을 연기로 대신 표현하는 배우로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제 자신이 없어졌더라고요. 처음엔 그게 무척 당혹스러웠어요. 인간 김해숙으로서는 불행한 일일 수도 있고. 그런데 어쩔 수 없나봐요. 그 때문에 배우로, 연기로 평생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결심을 매일 되새겨요. 그래서 연기하고 싶은 배역이 아직도 너무 많고, 어떤 배역을 맡게 될지 항상 설레고 기대돼요.”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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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중문화부 차장. 아이돌 편애 쩌는 딴따라 b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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