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혁신> 두 정씨의 상반된 운명

병자호란 때 청나라군의 길잡이였던 정명수와 그를 제거하려다 당한 충신 정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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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 출처 : 문화재청 홈페이지>

500년 넘게 이어온 조선왕조에는 27명의 왕이 있었고, 이 가운데 반정이 일어나 강제로 왕위에서 쫓겨난 이는 연산군과 광해군 두 명 입니다. 하지만 두 임금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를 둔 연산군에 대해서는 인간적 동정은 할지 몰라도, 나라를 망가뜨린 폭군이었다는데 별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나름 제대로 된 정치를 펴다가 기득권에 위협을 느낀 서인들의 반란에 당한 아까운 임금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 광해군의 치적으로는 대동법 시행, 전후 복구사업 등과 더불어 청과 명 사이에서의 실리외교가 손꼽힙니다. 실제 광해군은 1618년(광해군 10년) 청나라를 정벌하겠다는 명나라의 출병 요구에 응하면서도, 강홍립 장군을 따로 불러 적당히 눈치를 봐서 조선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강홍립은 소극적으로 싸우다 청군에 항복했고,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조선군 병사들은 대부분 이듬해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관노 출신의 통역사 ‘정명수

그런데 조선군 포로 가운데 청나라에 눌러 앉은 이도 있었습니다.
정명수라는 관노 출신 병사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청나라(여진) 말을 배워 청나라 장수들의 눈에 띄게 된 정명수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 역관(통역사)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인조반정 뒤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폐기되고, 조선과 청나라 사이 긴장이 높아만 가던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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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영화 ‘최종병기 활’ 스틸컷>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인조 11년(1633년), 정명수는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합니다.
황해감사 오숙이 조정에 “호역(胡譯‧오랑캐어 통역사)인 정명수는 은산현의 하인인데, 평산 현감 홍집이 일찍이 은산현감으로 있을 때에 정명수에게 곤장을 쳐 벌을 준 혐의가 있었기 때문에 관아에 갑작스레 뛰어들어 그에게 심한 모욕을 자행하였으니 매우 가증스러운 일입니다. 조정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소서”라는 장계를 올린 것입니다. 은산현 관노였던 청나라 통역 정명수가 예전 자신을 벌줬던 현감에게 보복을 했으니 벌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조정에서는 이 사안을 논의한 뒤 정명수가 조선 사람이라지만 용골대의 통역으로 온 이상 “아무리 벌을 주고 싶어도 형세상 줄 수 없다”며, 엄중히 금지해달라고 요청하는 선에서 마무리하고 맙니다.

청나라의 위세를 업은 정명수

3년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명수는 청 장수들의 통역이 돼 청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옵니다.
한때 관노였던 정명수가 정벌군 내 조선인으로는 최고 실력자가 돼 돌아온 것입니다. 남한산성에 갇혀 겨울을 나던 인조는 청나라와 강화하기 위해 용골대와 마부대에게 은 3천냥씩을, 정명수에게 1천냥을 뇌물로 건네자는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입니다. 당시 실록에서는 인조가 “모름지기 비밀리에 주고 누설되지 않도록 하라”며 신신당부를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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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서문전투도 / 출처 : 광주시사 홈페이지>

하지만 남한산성의 항전은 오래가지 못했고, 인조는 청 황제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바닥에 찧어 항복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후 인조는 물론 모든 조정 신료들은 정명수의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정명수가 사신 길에 첩을 빼앗고, 조선 관리들을 구타하고 뇌물을 요구해도 다 들어주는 것 외에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실록에서는 1639년 말 인조가 정명수의 처남인 봉영운에게 벼슬을 내렸다고 전합니다. 봉영운은 정주의 관노였는데, 그의 여동생이 포로로 심양에 끌려갔다가 정명수의 부인이 된 사람입니다. 아무런 공도 없는 노비를 관리로 임명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청나라의 위세를 업은 정명수는 불가능도 가능하게 할 정도로 큰 위세를 부렸던 것입니다.

봉영운은 되레 “저는 천한 노예로 공로도 없는데다가 바야흐로 어미의 상중에 있는데, 정명수의 처족이라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관인(官印)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청을 달갑게 여겨 어미의 상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민망합니다”며 만호, 첨사 등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사실 청나라는 한 뿌리에서 났다며 정벌 뒤엔 조선을 비교적 관대하게 대해줬습니다. 그런데 되레 조선인 출신 통역인 정명수가 호가호위를 하고 나서자 조선으로서는 속이 터질 일이었습니다. 적국의 앞잡이가 된 것만도 용서가 안됐을 텐데, 청나라 황제의 신임을 믿고 신하들은 물론 왕에게까지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니 미움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도중 사건이 터집니다.

정명수를 막으려고 한 충신 ‘정뇌경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해 남한산성 피난길에 동행하고, 인조가 항복한 뒤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볼모로 청나라 심양에 끌려갈 때 이를 자청해서 수행한 정뇌경이라는 신하가 있었습니다.
*호종하다 :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르다

정뇌경은 주변 사람 몇몇과 모의를 한 뒤 정명수가 조선이 청나라에 보낸 세폐를 도둑질했다며 이를 고발하도록 했습니다. 청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혀 진상조사에 나섰는데, 물증이 없고 모의를 했던 일부가 배신을 하는 바람에 되레 정뇌경이 황제의 신하를 모함했다는 죄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청나라는 당시 인조나 소현세자 쪽이 배후에 있는 것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정뇌경은 이 모든 것을 본인이 안고 세상을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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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뇌경 묘지석 및 함 / 출처 : 광주시사 홈페이지>

이 또한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1639년의 일로, 정뇌경의 나이 불과 32살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스승이자 충신인 정뇌경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으로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동생인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함께 자기 옷을 벗어 염습해줬다고 전합니다.

여하튼 정명수의 악행은 더욱 심해져만 갔고, 1642년 인조는 “정명수의 청에 따라” 봉영운을 영원군수로 임명합니다. 정명수는 이외에도 끊임없이 조정 대소사에 관여해 정승, 판서 인사에 개입하거나 대신들을 불러놓고 훈계하는 일도 잦았습니다. 뇌물도 밝혔고, 정명수 자신은 1648년엔 영의정과 같은 정1품인 영중추부사가 됩니다. 온갖 친인척들과 지인들이 관직을 받았음은 물론입니다.

정명수의 최후

하지만 포악한 정명수는 천수를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1653년(효종 4) 심양에서 성주 포수 이사용에게 모살되었다고 전하는데 정확한 죽음의 경위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청나라 내부 정세 속에서 실각한 뒤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보입니다. 1653년 11월 실록을 보면 효종이 청나라 사자를 만나 정명수의 죄목을 열거한 뒤 “상국(청나라)에서도 그 죄악을 알아서 벼슬을 삭탈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하니, 우리나라 백성의 기쁨을 어찌 이루 말하겠습니까. 다만 뒷날 폐고(廢錮‧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함)에서 일으켜 다시 쓸까 염려됩니다”라며 말을 건네자, 사자가 “정명수가 방자한 것은 나도 압니다. 그의 죄명이 매우 무거우니 폐고에서 일으켜 쓸 리가 만무합니다”라고 답한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정명수가 죽은 뒤 그의 위세를 등에 업고 관직을 얻은 이들도 일거에 정리됩니다. 1653년(효종 4년) 실록에는 “평안감사 허적이 정명수의 친당(패거리) 수십 인을 열거해 적고 죄의 경중을 나누어 아뢰었다”며 이들의 처리를 의논합니다. 그 결과 정명수의 일족들 대다수가 목숨을 잃어야 했고, 나머지 패거리들도 쫓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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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뇌경 영정 / 출처 : 광주시사 홈페이지>

반면에 조선의 반역자였던 정명수를 제거하려다 되레 목숨을 잃은 정뇌경은 대대로 충절의 상징이 됩니다.
그가 죽고 백수십년이 흐른 뒤인 1799년, 정조는 정명수를 죽이려다 되레 죽임을 당한 정뇌경의 절개를 기리라고 전교를 내립니다. 정조는 교지에서 “나는 충정공 정뇌경의 문제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에 맺혀 풀리지 않는다. 부노(俘奴‧정명수)가 우리 임금에게 대들고 모욕하던 날을 당하여 그 능욕을 받은 수치는 적들이 호통 치는 것보다 백배나 더하였다”라고 합니다. 고조할아버지인 인조가 노비 출신인 정명수에게 받았을 모욕을 생각하니 화가 풀리지 않더란 것입니다.

결국 정명수-정뇌경의 사례도, 오만한 권력자의 그 뒤끝이 좋을 수 없고 바른 뜻을 세운 이는 훗날 분명 평가를 받는다는 사필귀정을 생각나게 합니다. 마침 지난 화요일, 11월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었습니다. 나라와 대의를 위해 초개같이 목숨을 버렸던 정뇌경과 민족 반역자로 평가되는 정명수의 상반된 삶을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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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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