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미생(未生)’-‘미생지귤지형리’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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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tvN 제공>

비정규직 청년을 주인공으로 직장인들의 애환을 그린 드라마 <미생>의 여진이 만만치 않습니다. 드라마는 종영됐지만 인기가 치솟은 주인공 임시완을 비롯한 <미생> 출연진들이 등장하는 광고가 끊이지 않고, <미생>을 통해 직장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해하게 됐다며 가정주부들의 바가지가 줄어들었다는 웃지 못 할 뉴스까지도 있었습니다.

드라마 제목 ‘미생’은 바둑용어 ‘미생마’(未生馬•죽음과 삶이 아직 결정되지 않은 돌)에서 따온 말로, 비록 실패할 수도 있지만 완생(完生)이나 대마(大馬)의 꿈을 가지고 있는 ‘가능체’를 뜻한다지요.

아닐 미(未)와 살 생(生)을 더한 한자어 ‘미생’은 그 자체로는 ‘아직 살지 않았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란 뜻입니다. 실제 드라마에서 ‘미생’은 명사지만, 과거 문헌에서는 서술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500년 넘게 이어오던 조선이 망국을 코앞에 두고 있던 1909년(순종 3년), 한 상소문에도 ‘미생’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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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다행히 우리나라는 일본과 본래 같은 종족에서 나와 아직 탱자와 귤만큼 멀어져 판이하게 사는 것은 아니고, 지금 서로 다투는 것도 심하지 않은 만큼 그 국경을 없애고 두 이웃 사이의 울타리를 아주 없애버려 두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한 정치와 교화 밑에서 자유로이 노닐면서 다 같이 함께 살고 함께 다스려지는 복리를 누리게 한다면 누가 형이고 아우고를 가릴 것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극히 어진 일본 천황 폐하인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幸而我之與日本, 本出同族, 未生枳橘之迥異, 今迨相䦧之未甚廓然 撤其疆域 痛剗除兩隣之樊籬, 俾兩民自由, 遊一政敎下, 均享同居同治之福利, 則誰辦此兄此弟焉? 矧以日本天皇陛下之至仁)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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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구 사진 출처/ WIKIMEDIA COMMONS>

여기서 ‘미생(未生)’은 ‘아직 탱자와 귤만큼 멀고 다르게 사는 것은 아니고’(未生枳橘之迥異)란 구절에서 등장합니다. 조선과 일본이 한 뿌리에서 나와 귤과 탱자만큼 달라지기 전이니 합방해 함께 살도록 하자는 상소를 올린 이는 친일단체 일진회의 수장 이용구였습니다. 조선인 스스로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글에 ‘미생’이란 말이 쓰였다니 서글픈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던 ‘장그래’처럼, 100여 년 전 이 땅에 살고 있던 이들의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나라는 망국을 향해 치닫고 관리들은 썩어 있었으며, 지식인들은 사분오열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냈습니다. 그 와중에 일본을 등에 업은 매국노들이 큰소리로 궤변을 쏟아내고 있었으니, 시시비비를 조금이라도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누구라도 속으로 피가 끓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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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tvN 제공>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는 정규직 전환에 실패했지만 결국 뜻 맞는 상사와 함께 전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첫발을 딛게 됩니다. 100여년 전 ‘미생’의 주인공이었던 한반도의 민초들 또한 일제에 병탄돼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했지만, 결국엔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성공신화를 써나가게 됩니다. 당장에는 실패했지만, 긴 호흡에서는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두 ‘미생’은 공통적입니다.

물론 그런 성공은 거저 이뤄낸 게 아닙니다. 장그래는 ‘고졸 낙하산’이라는 딱지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혁신적인 자세로 업무에 임했습니다. 한국의 독립과 성공도 수많은 애국지사들과 산업화•민주화 인사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100여년 전이나 드라마 속 현실 못지않게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는 ‘미생’ 여러분들, 모두 ‘파이팅!’ 한번 외쳐보면 어떨까요. 노력하고 혁신하는 자세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이니 말입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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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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