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신해철’을 되돌아보며…

박경은 기자의 문화 속 혁신 <대중음악 혁신의 아이콘 신해철>
<사진 출처 /사진공동취재단>

마왕 신해철이 떠나갔습니다. 지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열정과 카리스마, 늘 넘치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그를 떠나보낸 것이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특히 동시대에 함께 살고 호흡하고 지내며 교감했던 뮤지션인 그의 죽음은 마치 곁에서 함께 지내던 오랜 친구가 떠난 듯한 황망함마저 안겨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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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KCA엔터테인먼트>

신해철의 이름이 대중음악계에서 갖는 의미는 혁신과 개척이었습니다. 대중음악평론가 임진모씨는 그를 가리켜 “90년대 대중음악이 산업적 위용을 갖추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자 당대 젊은이들의 의식을 견인한 주체였다”면서 “그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을 넘어선, 우리 시대 메시지의 상실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실제로 신해철은 90년대 음악 트렌드를 이끌었고 록음악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어디 록음악뿐 인가요. 가요계의 르네상스라던 그 시대에 그는 발라드, 록, 테크노, 일렉 등 모든 장르에서 실험성과 대중성을 고루 선보였고 동시대 뮤지션과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줬던 독보적 뮤지션입니다.

때로는 과할 정도의 자의식이 그의 곡에 넘쳐났지만 90년대 청소년, 청년기를 보냈던 수많은 청춘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데뷔했던 1988년 고교생이던 저는 개인적으로 그의 음악을 통해 <데미안> 이상의 울림을 받았고, 그의 음악은 답답하던 현실을 이겨내고 함께 공감해주던 친구같은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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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TV 방송 캡처>

그는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무한궤도라는 밴드를 통해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습니다. 무한궤도로서의 활동은 길지 않았습니다. 밴드를 하고 싶었던 그는 이후 솔로로 데뷔해 ‘안녕’, ‘재즈카페’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면서 음악적, 대중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미소년같은 외모와 감성적인 음악 덕분에 솔로 활동 초반 그는 여성팬을 사로잡고 인기 CF의 모델을 꿰차는 등 청춘 ‘아이돌가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지요.

그가 냈던 곡들은 당대 유행하던 유행가의 공식을 따르지 않은 파격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었습니다. 최초로 미디음악을 사용하며 혁신적인 시도들을 했지요. ‘위스키 브랜디 블루진 하이힐 콜라 피자 발렌타인데이’로 이어지는 감각적 스타일의 곡 ‘재즈카페’는 그 산물입니다. ‘안녕’이라는 곡에서 영어로 된 랩을 선보였던 것도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었고요.

<사진 출처 /TV 방송 캡처>

새로운 트렌드의 곡들을 대중에게 알리던 그는 2개의 솔로앨범을 낸 뒤 록밴드 넥스트를 결성하지요. ‘도시인’, ‘인형의 기사’, ‘날아라 병아리’, ‘The Ocean:불멸에 관하여’ 등의 곡을 히트시켰습니다. 그는 평단의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록밴드의 인기가 높지 않았던 그 시대에 넥스트는 어마어마한 팬덤을 누렸습니다. 당시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채울 정도의 관객동원력을 자랑했는데 지금 국내에서 활동하는 어떤 록밴드도 이정도의 관객동원력을 보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윤상과 함께 했던 ‘노댄스’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만들어 선보였던 음악은 록이 아닌 일렉과 테크노로, 당시 트렌드를 상당히 앞서간 창작물이었습니다.

90년대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며 그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정글 스토리> 등 영화음악을 비롯해 게임음악도 만들었고 ‘전람회’ 등 후배들의 앨범을 프로듀싱하기도 했습니다.

1997년 넥스트를 해체한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이후 그는 테크노를 비롯해 본격적인 전자음악 실험을 이어갑니다. ‘크롬스 테크노 워크’, ‘모노크롬’ 등이 이때 나왔던 앨범들이죠. 또 넥스트 때와는 다른 록음악을 하는 비트겐슈타인으로도 활동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아이돌 산업이 급성장하고 음반산업이 몰락하는 와중에서도 그의 실험은 그치지 않고 재즈 빅밴드 앨범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사진 출처 /TV 방송 캡처>

그는 음악창작 외에 라디오 DJ로도 맹활약했습니다. 고스트네이션(혹은 고스트 스테이션)이라는 프로그램을 10년이상 진행하며 마니아들을 양산했고 인디음악을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라디오는 당시 유일하게 인디음악을 들을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음악계 거물이자 스타 방송인으로 자리잡은 유희열은 신해철의 프로그램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진 출처 /TV 방송 캡처>

그는 음악을 통해서도 강한 메시지를 던졌고 실제로 사회참여적인 발언에도 적극 나섰습니다. 그의 음악은 자아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많이 던졌고 이후에는 가족, 이웃, 다음세대를 위한 이야기와 고민으로 확장됐습니다. 지난 6월 오랜만에 앨범을 내놓았던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그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다음 세대를 위한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경쟁에 살아남을 자기 계발서가 아니라 뭘해도 괜찮다, 좋다고 토닥여주는 목소리”라며 “뭘해도 다 좋으니 아프지만 말라던 제 할머니의 심정과도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더 울컥해지네요.

<사진 출처 /KCA엔터테인먼트>

그의 강한 모습은 ‘마왕’이라는 지위에 그를 올려 놓았습니다.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고 길을 개척해 간 시대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그와 오랫동안 음악적 교감을 해 온 한 라디오 PD는 “신해철은 늘상 앞장섰고, 온몸으로 쏟아지는 화살을 맞아내며 후배들이 가는 길을 닦았던, 고독한 삶의 주인공”이라고 떠올렸습니다. 46년간 뜨겁게 살았던 그를 떠올리는 많은 사람들 역시 그렇게 그를 기억합니다. 이제 그는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와 정신은 남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노래로 다음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이야기해야 할 때입니다.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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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대중문화부 차장. 아이돌 편애 쩌는 딴따라 b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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