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혁신> 명-조선의 ‘인간 핫라인’ 외교관, 원민생

지난번 글에서는 위구르에서 고려로 귀화해 조선 초까지 뛰어난 활약을 펼친 명외교관 설장수를 소개해 드렸는데, 이번에도 같은 외교관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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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계급이 맡았던 통역에서 시작해 종2품 고위직에 오르고, 명나라 황제와 조선 임금 사이 ‘인간 핫라인’ 구실까지 한 원민생이란 사람입니다.

명나라 사신행렬_위키피디아_대영박물관소장_

<통사로 14번, 사신으로 7번 명나라에 다녀온 원민생>

외교관 원민생은 태종 2년(1402년)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조정에서 가뭄 대책회의를 열어 죄수를 석방하고 무녀‧소경‧중들에게 비가 내리도록 빌게 하는데, 회의 초반 태종은 “어제 통사(通事) 원민생(元閔生)이 서북면(西北面)에서 왔으므로 지나온 곳을 물어 보았더니, 화곡(禾穀)이 다 말랐다고 한다”며 가뭄의 심각함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통사는 통역사, 서북면은 평안‧황해도를 뜻합니다. 중국 사신단을 따라갔다가 평안도, 황해도를 거쳐 돌아온 중국어 통역사 원민생에게 물었더니 ‘벼와 곡식들이 다 말랐다’고 답하더란 것이죠.

이듬해 실록에는 계품사(計稟使)의 통사인 원민생이 태종에게 내관 황엄 등 중국 사신이 왕과 왕비, 왕자의 관복과 서책 등을 가지고 온다고 아뢰자 왕이 기뻐해 말 한필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계품사는 고려 말~조선 초 긴급한 안건 처리를 위해 명나라에 임시로 파견하던 사신을 일컫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왕이 직접 통역사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다는 점입니다. 정사나 부사 같은 공식적인 사신단 우두머리가 있는데, 굳이 실무자를 불러 이런저런 얘기를 묻거나 중국 쪽 통보 내용을 전달받는다는 것이죠.

그 뿐이 아닙니다. 태종 14년 실록에는 원민생이 요동에서 오랑캐를 도벌하던 명 황제가 복병에 걸려 여러겹으로 포위됐다가 화약을 사용해 겨우 탈출했다는 정보보고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급 군사정보를 왕에게 직보하는 자리에 있었다는 얘기죠.

왕의 총애가 깊었기에 이런 역할을 했겠죠. 실제 태종 16년 권영균 등 사신단이 북경에서 돌아오자, 태종은 “원민생은 어째서 오지 않았는가? 뒤에 꼭 들어오라.”고 말합니다. 조선을 찾은 명 사신과 임금 사이 통역도 그의 몫이었습니다.

원민생은 바르기만 했던 사람은 아니었던 듯합니다. 태종 17년 밀무역을 이유로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단 여럿이 의금부에 투옥되는데 그도 여기에 포함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틀 뒤 실록에서는 “처녀 주문사로 경사(중국의 수도)에 보내려고 원민생을 먼저 석방하다”고 전합니다. 실제 투옥 며칠 전 실록은 나라에서 혼인을 금지했다며 “하정사(賀正使)의 통사 원민생이 경사로부터 돌아와 황제가 미녀(美女)를 요구한다고 밀계(密啓‧넌지시 아룀)한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종

<원민생은 태종에 이어 세종 대에도 큰 신임을 받았습니다. 워낙 뛰어난 외교적 성과를 거뒀기 때문인데, 원민생이 숨지자 세종은 그의 낮은 출신성분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직접 제문을 지어 공을 치하하고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세종 대 실록에서는, 명 황제도 원민생을 후하게 대우해 그가 주청하는 일은 많이 윤허해줬고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벼슬을 정헌대부까지 이르게 했다고 전합니다. 결국 원민생은 명 황제와 조선왕이 공식적으로 주고받기 민망한 내용을 직접 전달해주는 ‘인간 핫라인’이자, 양쪽 모두의 측근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대체할 수 없는 그런 특수한 역할을 했기에 하옥됐다가도 이틀 만에 풀려났을 수 있었던 것이겠죠.

중인 계급의 직업이었던 통역사였지만, 그는 고위직인 중추원부사 원빈의 아들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판사 민부의 수양아들이 돼 민덕생이란 이름으로 살다가, 외교관 양성기관인 사역원 부사에 이른 뒤에야 원래 성을 되찾고 원민생으로 살게 됐다고 실록은 전합니다. 양반의 아들이면서 성을 바꾸고 통역사가 된 것을 보면, 아마도 서자였던 것 같습니다.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시절 신분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그야말로 출세를 했던 것입니다.

원민생은 세상을 뜨고 한참 지난 뒤인 성종과 광해군 때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데, 두 경우 모두 조정에서 직급이 낮은 이를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낼 수 있느냐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통사가 정사가 된 전례가 있다며 언급된 케이스입니다. 원민생의 출세는 조선 역사 전체를 봐서도 ‘파격’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원민생은 세종 17년(1435년) 세상을 뜹니다. 2년 전 그에게 세자궁 살림살이를 총괄하는 종2품 안순부윤이라는 벼슬을 내렸던 세종은 직접 제문을 써서 내려줍니다. 세종은 제문에서 “경은 타고난 천성이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행실은 공정하고 청렴하였도다. 일찍이 사신될 만한 재주를 가졌으며, 본디부터 중국말의 음훈(音訓)을 잘 알매, 소고(昭考‧태종)에게 알아줌을 만나서 이미 칭찬을 거듭 받았도다”며 “금은(金銀)의 조공(朝貢)을 면제 받으매 기쁨이 동방(東方)에 넘쳤”다고 칭송합니다.

영락제

<원민생은 명나라 황제 영락제와도 아주 가까워, 영락제는 그의 청은 대부분 들어주고 높은 벼슬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에 바탕해 명나라에 대한 금과 은 조공을 그만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죠. 조선의 1급 로비스트로 활약했던 셈입니다.>

통사로 14번, 사신으로 7번 명나라에 다녀온 그는 명나라 조공품에서 금과 은을 면제받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당시 백성들이 더는 조공용 금과 은을 캐는데 동원되지 않아도 됐겠죠.

눈여겨볼 대목은, 위구르 출신 설장수와 한미한 통역사 출신 원민생 모두 조선 초기의 외교관이란 점입니다. 설장수는 1차 왕자의 난 뒤 명나라에 들어가 정종 즉위를 허락받아 왔고, 원민생은 양녕에서 충녕으로 세자를 바꾸는 것을 허락받아 왔습니다. 건국 초기 비정상적인 왕위 승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한 주역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셈입니다.

건국 초 나름 역동성있는 사회였기에 능력만 있다면 외국인이건 서자건 크게 쓰였고, 그 결과 이들이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실제 신분사회가 고착화된 조선시대 후반기로 넘어가면, 출신을 막론하고 이런 걸출한 외교관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역동성이 엿보이던 조선시대 초기와 같이, 우리가 사는 현재도 배경에 상관없이 능력을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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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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