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흐름을 뒤바꿨던 ‘사신(使臣) 살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가 한 극단주의자의 공격을 받고 얼굴과 손 등에 큰 상처를 입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외신들까지 일제히 속보를 내보낼 정도로 화제가 된 황당한 사건이었습니다. 한 지인은 “처음에는 중동 국가에서 일어난 일인 줄 알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가, 그것도 세계 최강국인 미국대사가 이렇듯 직접적인 공격에 노출되는 일은 반미정서가 심한 중동에서도 일어나기 힘든 일입니다.

돌이켜 보면, 수백년 전에도 외국 사신에 대한 공격이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하거나 나라를 위험에 빠뜨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큰 나라를 섬김)가 확립되지 않았던 고려시대에 주로 일어났습니다.

고려 중기인 1225년(고종 12), 고려 조정을 상대로 과중한 공물을 요구하며 물의를 일으켰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본국으로 돌아가던 도중 압록강(의주) 근처에서 피살당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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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누가 죽였는지는 아직도 미궁입니다. 횡포를 휘둘렀던 저고여에 분개한 고려인의 소행일 수도, 고려와 몽고를 이간질하려던 금나라 잔존세력(동진)의 모략일 수도 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죠.

여하튼 발칵 뒤집힌 고려 조정은 저고여는 금나라 도둑에 의해 살해됐다고 몽고에 통보합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몽고가 이런 설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리도, 가만히 있을 리도 없었죠. 몽고는 고려와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1231년(고종 19년)~1259년(고종 46) 사이 9차례나 고려를 침략합니다.

그 결과 전 국토가 황폐해지고, 경주 황룡사지 목탑 등 시설과 문화재들이 소실됩니다. 수많은 백성들은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결국 고려는 몽고 황제의 부마(사위)국이 됩니다.

저고여가 피살되지 않았더라도 몽고의 세계지배 전략상 고려를 침입했을 수 있지만, 저고여 피사 살건이 고려 침입에 힘을 보태고 몽고를 더 자극한 것은 사실입니다.

몽골이 쇠약해지고 명나라가 일어서던 고려 말기에도 사신 피살사건이 일어납니다.

명나라_픽사베이

역시나 고려에 과도한 조공을 강요하던 사신이 희생양이었습니다. 1374년(공민왕 23년)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개주참(開州站·지금의 봉황성)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호송하던 고려 관리 김의는 평소 행패를 부리던 사신 채빈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또다른 사신인 임밀을 납치해 장병 300명과 공마 200필을 끌고 북원(몽고) 나하추에게 귀순합니다.

사신 피살도 큰일인데, 하필 호송하던 고려 관리가 가해자였으니 큰 풍파가 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채빈·임밀이 개경을 출발한지 얼마 안돼 공민왕이 피살된 터라 고려 조정은 혼돈 상태였습니다. 당시 실권자였던 이인임 일파는 이 사건을 계기로 북원과의 통교를 추진하고, 정몽주 등 신진 사대부들은 이에 반대하는 등 조정에서는 내분이 일기도 했습니다.

명나라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고려 사신을 잡아가두기도 하고, 공민왕 시해와 관련해 고려를 책망하며 침공하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습니다. 북원과의 통교를 의심해 입조(실권자가 직접 입국해 인사 올림)와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기도 하죠.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조정은 한동안 이 사건과 관련해 명나라의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고 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신에 대한 공격은 해당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되고, 이에 따라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번 사건을 두고 미국 정부나 언론이 ‘테러’ 대신 ‘폭행’으로 일컫고, 개인의 돌출행동으로 보고 차분히 대응한다는 점입니다. 한미동맹에 대한 이의제기로 보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대응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서겠지만, 어찌됐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진영에 따라 가해자를 ‘진보진영 인사’ 또는 ‘극단적 민족주의자’라며 달리 보며 정치적 반대파 공격의 빌미로 삼는 듯한 국내 상황입니다. 반미투쟁 선동의 계기로 활용하려는 북한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겠죠.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은 이렇듯 남한이나 북한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남깁니다. 리퍼트 대사의 쾌유를 빕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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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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