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술자리 문화

술자리 접대문화와 온정주의, 조선시대에도 다르지 않았으니

국세청과 감사원 공무원들이 서울 강남의 유명 주점에서 접대를 받고, 여종업원들과 속칭 ‘2차’를 나갔다가 경찰에 적발되는 일이 최근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대가성 없더라도 100만원 이상 향응을 제공받으면 형사 처벌하는 ‘김영란법’이 국회를 통과해 세상이 떠들썩했던 게 엊그제인데, 간덩이가 부은 공무원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만만한 곳인가 봅니다.

국세청과 감사원은, 정부 기관들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권력기관들입니다. 경제검찰로 불리는 국세청은 세금징수라는 업무 특성상, 재벌이나 대기업들도 그 앞에서는 숨소리를 죽입니다. 감사원은 일반 국민들이야 어떤 기관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체감하기 어렵지만,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갑중의 갑’으로 손꼽히는 기관입니다. 공무원들의 비위나 업무상 잘못을 살피고 찾아내어 처벌하도록 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도 힘쎈 관리들의 술자리 접대문화는 큰 문제였습니다. 조선이 개국한지 25년밖에 되지 않았던 1417년(태종 17년) *조선왕조실록(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기록한 책)에는 “감찰(監察) 정여(鄭旅)·원욱(元郁)을 파직(罷職)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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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위키백과 ‘조선왕조실록’>

여기서 일컫는 감찰은 지방 *수령(고려ㆍ조선 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과 *향리(고려ㆍ조선 시대에, 한 고을에 대물림으로 내려오던 구실아치)들이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는지, 백성들에게 횡포를 부리지는 않는지 감찰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기 위해 사헌부에서 각 지역에 파견되던 관리인 행대감찰의 준말입니다. 조선 초기 행대감찰에 ‘암행’ 성격이 더해져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직책이 바로 암행어사입니다.

행대감찰인 정여와 원욱이 수원으로 내려오자 ‘감찰 대상’인 수원*부사(조선 시대에 둔 대도호부사와 도호부사를 통틀어 이르던 말) 박강생은 연못가 정자로 이들을 초대해 염소를 잡고 술자리를 마련합니다. 멀리 과녁을 세워놓고 활을 쏠 수 있도록 준비도 합니다. 활쏘기 시합을 해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면 기생들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도록 해 흥을 돋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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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Wikimedia Commons’활쏘기’>

수령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 되레 수령으로부터 성대한 접대를 받았다는 소문이 한양에까지 퍼졌고, *사헌부(고려ㆍ조선 시대에, 정사(政事)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여 그 책임을 규탄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가 나서 이들을 처벌해달라고 주청합니다. 금주기인 농번기에 술판을 벌인 것 자체가 불법이고, 행대감찰이란 신분을 감안하면 더욱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얘기였습니다. 보고를 받은 태종은 두 사람을 파직도록 합니다.

정여와 원욱을 접대한 수원부사 박강생은 그 즈음 또다른 술자리 사고를 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과천현감(지방행정관서인 현(縣)에 둔 우두머리) 윤돈이 한양으로 발령 나 떠나게 되자, 금천현감 김문 등과 함께 관할지도 아닌 안양사(安養寺)까지 찾아가 *전별연(보내는 쪽에서 예를 차려 작별할 때에 베푸는 잔치)을 연 것입니다. 박강생은 이 자리에서 금천현감 김문에게 소주 마실 것을 강권했는데 그가 돌연사하는 바람에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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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전별연’>

이 소식을 보고받은 태종은 “사람을 죽이고자 술을 권한 것은 아니고, 인근 고울 수령 전별연회 또한 늘 있는 일”이라며, 박강생을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하도록 합니다. 이 일이 있은 지 한달도 채 안돼 정여·원욱 접대 건이 터지자 이번에도 “이미 파직됐다”며 그냥 넘어가도록 합니다.

결국, 과도한 술자리 접대문화만이 아니라 술자리 사건사고에 관대한 분위기 또한 지금과 놀랄 만큼 비슷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파직됐던 이들은 훗날 어떻게 됐을까요? 정여는 곧 *병조좌랑(조선시대 병조(兵曹)에 둔 정육품(正六品) 관직으로 정원은 4원)에 복직해, 조정에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고 상대하는 중책을 수행하다 벼슬이 *예조판서(예악(禮樂) ·제사 ·연향(宴享) ·외교 ·학교 ·과거 등을 관장한 예조의 으뜸 벼슬) 겸 *홍문과 대제학(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의 정2품 벼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박강생 또한 세종 대에 복권되어 *안변도호부사(도호부(都護府)를 다스리는 으뜸 벼슬로 종삼품(從三品)관직)를 지내고, 딸을 세종 후궁(귀인 박씨)으로 들여보내 찬성에 *추증(추가)되기도 합니다.

이들이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고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가문이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정여는 아버지(정강)가 공조판서를 지낸 대갓집 자제였고, 박강생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원종공신(原從功臣)인 박침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심각한 술자리 접대문화, 책임자들에 대한 온정적인 분위기, 신분이나 가문에 따른 처벌강도의 차이…. 이런 게 옛날 이야기 만은 아닌 듯해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번에 사고(!)를 친 국세청과 감사원 공무원들이 과연 어떤 정도 처벌을 받게 될는지 궁금해집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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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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