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혁신> 조선 최고 외교관은 외국인이었다?

위구르 출신 ‘조선 최고의 외교관’
고려~조선 교체기에 종1품에까지 올랐던 설장수

요즘 조선 건국 시기를 다룬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인기라고 합니다. 육룡이 나르샤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조선 건국에 참여해 중요한 역할을 한 한 외교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바로 ‘설장수’ (偰長壽)란 외교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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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SBS ‘육룡이나르샤’>

우리나라의 역사를 설명하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단일민족’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이는 틀린 말입니다. 수천년 역사 속에 원하건 원하지 않건 중국, 일본 등 이웃나라와 접촉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피도 섞였을 테니 말이죠. 박연(벨테브레)처럼 멀리 유럽에서 온 경우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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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위구르족’>

설장수는 귀화한 위구르인이었습니다. 고려 말~조선 초 판서(정2품)보다 높은 종1품인 판삼사사(判三司事) 자리에까지 오른 ‘외교의 달인’이었답니다.

설장수는 10대 후반에 아버지인 백료손(伯遼遜·설손)이 고려에 귀화하면서 이 땅과 인연을 맺게 됩니다. 공민왕은 왕자 시절에 원나라 수도에서 황태자를 시종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 황태자 교육기관에서 일하던 백료손과 어울려 지냈다고 합니다. 고려 말기 홍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어려워지자 백료손은 가족들과 함께 공민왕이 다스리고 있던 고려로 귀화합니다. 공민왕은 옛 친구가 찾아왔다고 반기며 봉토를 하사하는 등 우대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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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공민왕’>

백료손의 장남이었던 설장수는 귀화 당시 10대 후반이었는데, 몇년 뒤 과거시험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 위구르어, 중국어, 몽고어에 능통했던 그는 외교 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칩니다. 우왕 시절부터 명나라를 드나들며 명나라와 무난한 관계를 맺는데 공을 세우고, 점차 엘리트 관료그룹 일원으로 커나가게 됩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1389년 흥국사에서 정권 핵심인사 8명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내쫓고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옹립하는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때 조준, 정도전, 정몽주 등과 함께 설장수도 회의 멤버였습니다. 당시 모임에는 정도전과 조준 등 새 왕조를 건국하자는 쪽과 정몽주 등 고려를 개혁하자는 쪽이 함께 했는데, 설장수는 후자 쪽에 선 인물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정몽주가 죽임을 당하고 새 왕조가 건국되자, 고려개혁파였던 설장수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실제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에게 조선 건국 반대편에 섰던 이색, 우현보 등과 함께 설장수를 처벌하라고 강력하게 건의합니다. 하지만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이들을 귀양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하도록 합니다. 귀향은 반년도 안돼 풀렸고, 설장수는 외교관 양성 기관인 사역원 창설 책임자에 임명됩니다. 그만큼 태조의 신임이 각별했다는 얘기인데, 한편으로는 그를 대체할 만한 외교 전문가가 없었다는 요인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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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정도전’>

태조 5년(1396년) 설장수는 정도전의 끊임없는 견제 속에서도 정승과 판서 사이 계급인 종1품 판삼사사에 임명됩니다. 그와 동시에 태조는 설장수가 계림(경주)을 본관으로 삼도록 해주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 사실을 전하며 “설장수는 회골(回鶻) 사람이다”는 설명을 덧붙여놓고 있습니다. 회골은 위구르를 가리키는 옛말입니다. 설장수는 이듬해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인 납향제를 주관하는 헌관이면서도 행사에 지각했다는 죄로 파면됐는데, 이번에도 역시 한달여 만에 복직됩니다.

그 즈음 명나라는 요동정벌을 꾀했었다며 조선 조정에 정도전을 소환하라고 통보하는데,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권근과 설장수가 명나라 황제를 찾아가 오해를 풀고 왔는데, 정도전은 이번에도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태조는 “천자가 진로(震怒)하였을 때를 당하여, 자청하여 가서 능히 천위(天威)를 풀리게 하여 다시 경을 부르지 않았으니, 나라에도 공이 있고 경에게도 은혜가 있다. 나는 상을 주려 하는데 도리어 죄주기를 청하는가?”라며 면박을 줍니다. 그만큼 태조가 설장수의 공을 높게 평가하고 신임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설장수는 훗날 태종이 되는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하는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명나라를 찾아가 정종 즉위를 승인을 받아오는 등 외교관으로서 활약을 이어갑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설장수가 모두 8번 명나라를 다녀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키에 매부리코였을 위구르인이 조선의 국익을 위해 명나라에 가서 이런저런 활동을 했을 모습을 상상하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려 합니다.

설장수는 정종이 즉위한 1399년 여름 마지막 명나라 방문에서 돌아왔는데, 그해 가을 59살을 일기로 세상을 뜹니다. 조정은 조회를 정지하고 직접 장사를 지내주며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줍니다. 설장수는 설내·설도·설진 등 아들을 뒀지만, 안타깝게도 설장수 이후로는 귀화한 위구르인과 관련한 별다른 활동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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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도, 문화도 갈수록 글로벌화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한국에 체류중인 외국인이 200만을 향해 늘어가고 있구요. 이렇듯 명실상부한 국제화 시대를 맞았지만, 아시아나 아프리카 계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는 게 현실입니다. ‘육룡이 나르샤’에 실존 인물이었던 설장수를 등장시켜보면 재미있을텐데, 작가에 전할 방법이 없어 아쉬울 뿐입니다. 그와 별개로 이땅에서 나지는 않았지만 설장수처럼 이땅을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을 모아 기리는 일을 누군가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이순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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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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