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

B.C 539년,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한 ‘위대한 왕’ 키루스 2세의 바빌로니아 원정

 

01-Untitled-1-7911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사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자리잡은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국제도시였습니다. 무려 25만 명이 살고 있었죠. 그 거대한 규모에 걸맞게 높이 30m의 이중 성벽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깊은 해자가 있어 외부로부터의 침입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성벽에는 창과 활로 무장한 병사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죠.

02-La_chute_de_Babylone-791

하지만 키루스 2세는 기발한 방식으로 성벽을 뚫었습니다.유프라테스 강물을 끌어오기 위해 만들어졌던 운하 저수지 시설을 이용한 것입니다.강줄기를 운하로 돌리도록 하자 저수지 수위는 높아졌고, 그만큼 유프라테스강 수위는 낮아졌습니다. 추수감사축제가 한창이었던 밤, 페르시아 특공대들은 허벅지만 잠길 정도로 낮은 수위의 유프라테스강물을 따라 조용히 바빌론에 걸어 들어가 보초병들을 기습공격한 뒤 성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튿날, 바빌론의 새 주인이 된 키루스 2세는 바빌론에 노예로 끌려와 있던 유대민족 등 여러 고대 민족들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포고령을 내려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고 있답니다.

1차 세계대전, 반전의 역사를 이뤄낸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의 결단

03-Untitled-12-791

1914년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은 요새화된 프랑스 국경의 정면돌파 대신 북쪽의 중립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로 우회해 북해 연안을 거쳐 파리로 내려가는 ‘슐리펜(1891~1905 독일군 참모총장) 계획’을 실행합니다. 소국인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국방력을 봤을 때 작전의 성공은 떼 논 당상이었고, 다만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가 문제였습니다.

그해 8월 독일 1•2군의 60만 대군이 벨기에로 물밀 듯 밀려오자 벨기에군은 의외로 격렬하게 저항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군 30만 명과 독일군 50만 명이 북해 연안의 저지대인 플랑드르 지역에서 대치하며 격렬한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04-Untitled-133-791

독일군 우세가 명확해지자, 31세의 벨기에 국왕 알베르 1세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해안가 수문방조문을 열도록 한 것이죠.그 결과 폭 3~4㎞, 깊이 1m의 물이 내륙으로 16㎞ 지점까지 들어왔고, 독일군은 바닷물 섞인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주민들과 농장을 생각하면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것은 자충수였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서는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한 수였습니다. 애초 계획과 달리 독일군은 길고 긴 소모전에 빠져들어야만 했습니다.

이처럼 서로가 죽고 죽이는 전쟁은 비할 바 없이 참혹한 일이지만, 창조와 혁신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생존이 달린 절박함 속에서 ‘창’과 ‘방패’의 끊임없는 경쟁은 기술의 진보로 이어지며, 기술뿐 아니라 주변 상황을 최대한 효율적, 창조적으로 이용하는 발상의 전환도 그 가치를 발하게 됩니다.

경우에 따라 물을 빼거나, 물을 들이는 것은 큰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상황에서 물을 이용한 결단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성공적인 작전이 됐습니다.그러고 보면 혁신이란 것은 새삼스러운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냉철한 분석에 바탕한 발상의 전환이야말로 혁신의 또 다른 정의 아닐까요? 이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남달리 출중한 능력을 타고난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만 혁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로운 사고를 펼칠 수 있는 유연함만 있다면 누구나 혁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순혁 기자

|

‘철학’을 전공하고 ‘언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