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3 선경의 유공, 무엇이 달랐을까

SK_기업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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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북예맨 마리브에서 생산한 원유를 싣는 모습>

1980년 1월 23일, ㈜선경과 대한석유지주 사이에 대한석유공사 매매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임시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로 선출된 故 최종현 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각오를 밝히고 다음 세 가지 사항을 국민에게 약속합니다.

 “첫째, 석유의 안정공급을 위해서 선경이 가진 힘을 다해 경영에 임하겠다. 둘째, 정부에서 제시한 일곱 가지의 인수 조건에 대해 심혈을 기울여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셋째, 이를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유공 주식 전부를 정부에 반납하고, 선경의 경영에서도 손을 뗄 각오다.”

故 최종현 회장은 기업확장, 기술개발 등 모두 9개의 경영방침을 세우고 임직원들 스스로 관리역량을 키워나갈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1982년, 대한석유공사의 상호가 ‘주식회사 유공’으로 변경하는데요, 이렇게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유공은 매년 부채비율 개선, 매출액 증가를 통해 1983년에는 197억 원의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답니다. ‘선경의 유공’이 빛을 발한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선경의 유공’ 이야기를 지금부터 전해드리려 합니다^^

 

유공해운

<1982년, 유공해운 설립>

유공 인수 직후에 취해진 선경은 유공의 원유를 수송할 전담회사를 설립합니다. 유공의 원유 및 기타 유류의 안정적인 수급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1982 1 28, 유공해운을 설립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공해운은 원유 수송을 위해 25만 중량톤 급의 대형 유조선 두 척을 도입해 유공리더호, 유공파이오니어호로 명명합니다. 1986년에는 현대중공업에 3척의 대형 유조선을 발주했는데요. 대한민국 해운회사가 우리나라 조선사에 초대형 유조선을 발주한 것은 유공해운이 최초였다고 하네요. 세계의 석유자원을 향해 뻗어 나갈 초석을 마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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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산유국,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故 최종현 회장은 유공의 사업 비전을종합에너지기업으로 설정하고 이른바무자원 산유국 프로젝트를 제시합니다. 참으로 획기적인 발상이었지만 회사 안팎의 시선은 차가웠습니다. 해외 유전 개발은 성공률이 5%에 불과한데다 대규모 자본 투자가 필요한 만큼 실패할 경우 회사 경영에 악영향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려의 시선에도 故 최종현 회장은 자신의 전략을 믿고 과감하게 밀어붙입니다. 선경이 다른 기업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유전개발에 나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故 최종현 회장의 남다른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해외 석유개발 사업이 순탄하게만 진행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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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시도한 인도네시아 카리문 광구 개발에 이어 아프리카 모리타니아 제9광구 개발까지, 해외 석유자원 개발 사업은 연이어 실패하고 말았어요. 산유국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했습니다.

 

<1988년 1월, 북예맨 마리브에서 생산한 원유를 싣고 입항하는 Y위너호>

하지만 연이은 실패에도 故 최종현 회장과 유공은 무자원 산유국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 결과 마침내 1987, 북예멘의 마리브에서 추정 매장량 10억 배럴의 유정을 발견! 국내 기업 최초로 원유를 생산하게 됩니다. 석유개발사업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단기간의 성과이자, 당시 하루 평균 원유도입량의 약 4%에 달하는 원유를 공급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엄청난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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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브 광구의 성과에 고무된 유공은 뒤이어 미얀마 육상광구 개발을 추진합니다. 그러나 개발은 시작부터 험난했는데요, 시추 지역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밀림 한가운데 있어 모든 자재를 헬기를 통해 실어 날라야 했습니다. 4년 동안 가끔 작은 유정이 발견되기도 했으나 대규모 유전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공은 눈물을 머금고 미얀마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당시 사업에 들어간 투자금이 상당했지만, 故 최종현 회장은 오히려 관계자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았습니다. 자원개발에 대한 그의 철학을 잠시 엿보고 넘어갈까요? 

 “개발사업이란 본래 1, 2년 이내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므로 10년이고, 20년이고 꾸준히 노력해야만 그 성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경상이익금의 일정 부분을 무조건 석유개발 사업에 투자하기로 회사 차원에서 결정해야 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석유 개발사업에 참여한 사람을 문책해서는 안 된다. 특히 실패에 대해 정책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故 최종현 회장의 글입니다. 이러한 최고경영자의 흔들림 없는 의지와 배려 덕분에 유공은 석유개발 사업을 계속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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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카미시아 유전 전경>

실패 사업에 박수를 보낸 결과는 연이은 해외 유전개발 성공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1996 7월에는 페루 8광구로부터 지분 원유를 배분 받기 시작했습니다. 페루 석유자원 개발은 당시 우리나라 기업들의 해외 유전개발이 중동이나 동남아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상황에서 남미 지역을 새로운 자원영토로 넓혔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1998 9월에는 베트남 남동쪽 해상에 위치한 15-1광구 원유개발 사업에 참여하게 되는데요. 당시 우리나라는 IMF 외환위기였으나, 유공은 불황이 오히려 투자의 적기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광구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이미 여러 기업이 포기했던 지역인 만큼 유전개발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2003 10월부터 원유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베트남 15-1광구는 미국지질학회에 의해 2000년 세계 7대 유전으로 평가받을 만큼 그 매장량이 엄청나다고 해요^^

이렇듯 해외 석유자원 개발을 통해 많은 성공 신화를 남겼던 유공은 2007 SK에너지로 명칭을 변경하고 현재까지도 에너지 산업을 선도해오고 있습니다.

선경의 유공, 과연 무엇이 달랐는지 확인하셨나요? 유공에서 시작된무자원 산유국 프로젝트 SK에너지에서 계속되고 있답니다. 다음 화에서는 수직계열화를 완전하게 실현한 SK 울산CLX에 관해 이야기 해드리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SK이노베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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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넘어 더 큰 세상으로 에너지·화학의 큰 그림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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