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이노베이션이 지나온 길

<혁신 공식 지기> SK이노베이션은 어떤 회사였을까요?

1962년 10월 13일.
SK이노베이션은 대한석유공사라는 이름으로 시작됐습니다. 6.25 전쟁 이후 불모지와 같던 대한민국이 산업화로 향하던 첫발을 내디뎠죠. 그리고 50년의 세월. 대한민국의 에너지 산업과 함께 SK이노베이션의 역사는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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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정유공장 준공식>
60~70년대: 대한민국 최초의 정유사, 국가경제발전에 핵심적 역할

62년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실시되는 원년으로 성공적인 경제정책의 추진을 위해 석유에너지 안정공급과 국가경제 기간산업으로서 정유공장 건설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정유공장 건설을 결정하고 1962년 7월 24일 대한석유공사법을 제정, 10월 13일 설립등기를 마침으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정유회사인 대한석유공사(82년 선경인수 후 유공으로 사명변경)가 설립됐습니다.

그러나 첫 발걸음은 쉽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당시 미국 UOP사와 기술용역계약을 체결하고, flour사와 건설계약을 체결해 본격적인 정유공장 건설에 착수하였으나 돈을 구할 방안이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에 정부는 외자유치를 추진하여 걸프사에서 총액 2,500만달러(31억) 상당의 투자를 결정했습니다. 극적으로 1963년 12월 정유공장을 완공했고, 그 이듬해 약 45일간의 시운전을 거쳐 4월 1일 정상가동에 들어감으로써 석유류 제품의 역사적인 국내생산이 시작되었죠.

1964년부터 69년까지 국내 석유류 제품의 소비 실적은 고도 성장에 맞춰 연평균 48%씩 늘어났습니다. 도저히 필요로 하는 양에 맞추기 힘들었죠. 하지만 이제 막 산업화에 발걸음 뗀 상황에서 갖고 있는 자금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정부는 1970년 걸프사로부터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고 경영권을 걸프사에 이양하면서 10년 동안 걸프사가 경영권을 행사했습니다.

이에 유공은 제2차 경제개발의 중점육성산업인 석유화학공업에 필요한 원료공급을 충족시키기 위해 공장 규모를 2배 가량 늘릴 수 있었고, 안정적인 산업화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70년대 유공은 석유화학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습니다. 72년 10월 석유화학산업의 쌀이라는 에틸렌을 생산할 수 있는 나프타분해센터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석유화학공업에 실질적인 첫 발이었죠.

80~90년대: 수직계열화에 대한 오랜 염원과 철저한 준비로 유공 드디어 SK품으로

산업화의 자금원으로 큰 역할을 했던 걸프사는 장기적인 관점을 갖기보단 단기적 투자이익 회수에 치중했습니다. 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큰 꿈을 갖고 있었던 대한민국 정부와 갈등을 빚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갈등속에 걸프사는 유공에 투자한지 17년, 경영권 인수로부터 약 10년 만에 완전한 철수를 단행하게 됐습니다.

80년 8월 걸프사의 철수에 따라 정부는 유공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다각적 검토에 나섰고, 2개월 뒤 정부는 유공 민영화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국내 기업으로서는 매출액 1조원을 돌파한 유일한 기업이었기에 재계 순위 상위의 기업들은 모두 유공 인수에 뛰어들었죠.

그리고 그해 11월 정부는 선경의 유공 인수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중견 섬유기업에 불과했던 선경이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했을 당시 언론은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고 표현했죠. 하지만 이는 최종현 회장은 이미 73년 1차 오일쇼크 와중에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수직계열화를 천명하였고 철저한 사전준비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78년 2차 석유 파동을 겪으면서 당시 정부는 안정적인 원유 공급 능력을 중시했습니다. 최종현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와의 돈독한 관계를 바탕으로 장기 원유공급계약을 체결하고 80년 7월부터 국내 정유업계에 5만 배럴의 원유를 공급하며, 정부의 기대에 부응했습니다. 또한 장기 원유공급계약에 의해 SK(당시 선경)은 1억달러 차관을 끌어올 수 있었으며 이는 대한석유공사 인수의 최대 걸림돌인 자금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정국불안 등으로 정부의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드러난 상황에서 가뭄 속 단비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1980년 당시 유공 울산공장은 작은 정유공장 3개만 갖추고 있었습니다. 단기적 이익 회수에 나섰던 걸프사와는 달리 장기적인 관점을 갖은 SK는 유공에 대해 아낌없는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인수 이후 3년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고, 종합에너지회사로의 면모를 갖췄습니다. 석유화학도 기초유분에서 합성수지를 기초로 석유화학사업의 하류부문에까지 진출함으로써 종합화학회사로의 입지를 확고히 했죠.

1991년 6월 유공 울산콤플렉스에 폴리에틸렌(PE) 공장, 파라자일렌(PX) 공장 등 새 공장 9개가 들어서며 ‘석유개발-원유정제-화학제품 생산’으로 이어지는,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가 드디어 완성됐습니다.

또한 최종현 회장은 2차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1983년 국내정유회사로서는 처음으로 인도네시아 자바해상의 카리문광구 개발사업에 참여했습니다. 리스크가 크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이익의 15%이상을 매년 석유개발사업에 투자해야 할 것이며 실패하더라도 참여한 직원을 문책해서는 안된다”며 석유개발사업을 강하게 추진했습니다.

크고 작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해외석유개발사업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결과 마침내 1984년 개발에 참여한 북예맨 마리브 광구에서 대규모 유전개발에 성공, 1987년부터 본격적인 상업생산 시작되어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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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CLX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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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CLX 야간>
2000년대: 아·태 지역 에너지 화학 메이저를 넘어 기술기반의 글로벌 에너지 기업으로
내수에 머물던 정유·화학업종을 글로벌 시장으로 적극 진출시켜 국내 정유산업을 한단계 격상

1998년 최종현 회장이 타계함에 따라 최태원 회장이 경영일선에 뛰어들게 되면서 SK이노베이션은 국내를 넘어 세계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최 회장은 지난 2000년 신년사에서 “국내시장에서의 성공 경험과 경쟁력을 갖고 있는 SK가 기업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방법은 글로벌 진출”이라고 강조한 이후 본격적인 해외 진출 전략을 추진했습니다. 석유찌꺼기를 휘발유로 만들 수 있는 울산 제2차 중질유 분해시설(RFCC)에 2조원,인도네시아 윤활기유 공장에 1억달러(1060억원),페루 LNG 공장에 5000억원을 각각 투자하며, 새로운 도약기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투자와 글로벌 전략은 수출증가로 이어졌습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의 누적수출액이 101조원으로 국내기업 두 번째로 최근 5년 누적 수출액 100조를 돌파하였으며 2011년까지 누적으로는 150조원에 육박한 148조 4천억원을 기록했고, 2012년에는 50조원의 수출성과를 달성했습니다.. 2000년 초반 30% 미만이었던 수출비중은 2012년 기준 70%를 돌파했다. 이와 같은 성장세에 힘입어 2012년 대한민국 최대 수출품 지위를 차지하기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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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012년 SK이노베이션 수출액과 수출비중 추이>                   (단위:억원)

이는 수출지역 다변화 등을 적극적인 시장 확대, 경질유 위주의 고부가 가치 석유제품 수출확대와 함께 석유개발사업의 역할이 컸습니다. 원유생산량 전체를 해외로 수출하는 석유개발사업의 경우 지분원유생산량이 증가하면서 2011년 사상 처음으로 매출 1조원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석유개발사업에 대한 성과는 선대 회장부터 이어져온 끊임없는 투자와 지원에 기인합니다.최 회장은 故최종현 회장의 무자원 산유국 프로젝트를 이어받아 2004년 초 석유개발 사업을 석유개발사업부로 승격하고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최 회장은 수 차례 비행기에 몸을 실어가며 직접 사업을 챙기고 진두지휘하면서 2007년 베트남 광구 등 3개 광구, 2008년 콜롬비아 등 3개광구를 포함해 6개 광구에 새로 참여하였고, 2009년 5개 광구 투자, 2010년 페루LNG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등 자원외교에 앞장섰습니다.

SK이노베이션은 2014년 현재 15개국 22개 광구 및 4개의 LNG 프로젝트를 진행 중에 있으며 이를 통해 확보한 원유만 6억 3,000만 배럴입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10개월치 원유소비량에 이르죠. 올해 4월 텍사스와 오클라호마 지역 생산광구 2곳을 인수하며 ‘아메리칸 드림’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엑손모빌(Exxon Mobil) 등 글로벌 석유개발 기업을 탄생시킨 미국 본토에서 태극기를 단 한국 기업이 석유를 생산하는 일. SK이노베이션은 도전과 기회의 땅 미국에서 또 하나의 성공 스토리를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과 전세계에 에너지를 공급한 SK이노베이션은 이제 새로운 성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1년 1월 1일 SK이노베이션으로의 사명 변경과 함께 2009년 분사한 SK루브리컨츠에 이어 석유사업과 화학사업을 각각 SK에너지와 SK종합화학으로 분사했으며, 2013년 7월1일부로 SK인천석유화학과 SK트레이딩인터네셔널을 출범, 6사 독자경영체제의 구축하고 기존 사업의 경쟁력 강화와 신성장동력 발굴 노력을 가속화 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부족하여 외국 정유사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외국 기술을 빌려 정유사를 짓고 정유기술 빌어 정유공장을 가동시켰던 대한민국 최초의 정유사는 아태지역 4위의 글로벌 플레이어로 발돋움 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정유산업은 전세계 6위(정제규모)로 석유제품은 국내 수출품목 1위로 국가경제에 이바지 하고 있습니다. 기름 한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16개국에 5억만 배럴의 원유를 확보한 산유국으로. 앞으로도 SK이노베이션은 지속적인 미래에너지 개발을 통해 대한민국을 에너지 강국으로 만드는데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대한민국의 이노베이션은 계속될 것입니다.”

<SK이노베이션 주요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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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 50년 외형변화>

구분 대한석유공사 초창기(A) 1980년대 유공인수 당시 (B) 2011년연간보고서(C) 인수 당시대비 신장율(C/B) 비고
자산 34억원(’63) 7,661억원(’80.10월 인수 당시) 35조268억원  약45배
매출 55억5000만원(’64) 1조1200억원(’79) 68조3711억원  약60배 ‘62~’63년 매출 無
납입자본금 25억원(’63) 475억원(’79) 4,685억원  약10배 ‘62년 6억8천8백만원
수출 8만1천불(’64)*64년 6월에 약3만 배럴의 휘발유를 필리핀에 최초 수출 605억원(’80) 47조5,616억원  약786배 ‘62~’63년 수출 無‘76년 1억불 돌파(‘76~77 연속 1억불 돌파)
정유시설 용량 日産35,000배럴(’64) 日産 28만배럴(‘80) 日産 111.5만배럴  약4배
직원 수 99명 2,000명 6,046명  약3배

*`80년 12월 환율 660원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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